
불의의 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초능력이 생긴다면?
이 물음을 전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요 등장인물 두 명은 초능력자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실상은 철저히 계산된 능력이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레인맨」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니다. 도박사가 아니라 천문학적인 수를 암산으로 계산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10분 후에 비가 올 거예요"
10분 후 예측이 맞아떨어진다. 기후에 관한 고려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대입해서 10분 후에 비가 온다는 결괏값을 도출한 것이다.
겐토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천재 신경외과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다. 이후 의식이 돌아오지만 모든 기억을 잃고 만다.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뇌 내부에 얽히고설킨 기억의 연결 고리가 모두 끊어진 상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감정을 느끼는 등의 감각을 새로이 접한다. 더불어 인터넷을 사용하며 세상을 지식을 탐독한다. 뇌 속 뉴런이 급격하게 재정립된다. 연결이 촉진되어 계산 능력이 엄청난 속도로 빨라진다. 일종의 뇌 수술 부작용이다.
기존에는 당연했던 사고력, 그러니까 '김치는 맵다', '초콜릿은 달콤하다'와 같은 직관적인 사고력이 기후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것에 적용된다. 영락없는 예언가나 다름없다. 머릿속에 최첨단 AI 컴퓨터가 내장된 셈이다. 여기까지가 주된 중심 스토리다. 이 플롯만으로도 꽤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스토리만 있었다면 다소 싱거웠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누구인가. 이런 이야기의 바탕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휴먼 스토리가 숨겨져 있다. 이야기의 곁가지가 너무 방대해 반전 한 두 가지로는 놀라울 것도 없다.
한 줄, 한 줄씩 글을 이어 나간다는 그의 집필 방법론에 경외감이 든다.
초능력과 과학의 교차점을 아슬아슬하게 터치하는 작품이다. 끝까지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글 전개. 책을 펼치면 손에서 놓기 힘들었다.
저자는 이미 다양한 주제로 소설을 쓴 바 있다. 작가의 세계관은 어디까지 확장되는 것일까. 최근에도 신작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다. 「외사랑」, 「희망의 끈」이라는 책이다. 외사랑은 읽을 기회가 두어 차례 있었다. 다만, 주제가 동성애라고 하여 손이 가지 않아 아직은 미뤄두고 있다(특별한 편견을 가지고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길 바라며). 부커상 후보로 올랐던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읽은 적 있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읽었는데 동성애가 주제였더랬다. 그럼에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었다. 글을 재미있게 쓰는 작가였다. 후속작을 빠짐없이 찾아 읽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독이 없다는 걸 알아도 뱀을 보면 놀라듯. 익숙하지 않은 주제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들 뿐이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은 줄거리를 알지 못했기에 덥석 집어 들 수 있었다. 반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워낙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기에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줄거리를 들어야 하는 고역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읽을게 고갈되면 언젠가는 내 손에 「외사랑」이 들려지게 될 테지만, 아직은 좀 미뤄두고 싶다.
참고로 라플라스의 악마는 우주의 모든 입자에 대한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고 그것을 연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그러니까 '악마'라는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자. 데이터가 있고 계산할 능력이 있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데이터를 수집할 수도 없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물리의 법칙을 대입해서 계산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가 없다. 앞으로 족히 100년이 지나도 힘들 것이다. 그런 올마이티 한 계산기를 '악마'라고 의인화한 것이다.
실제 과학 이론은 아니고 철학적 사고 실험에 가깝다. 이 주제로 토론을 한 적 있는데 몹시 피곤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때 랜덤프로세스 과목을 듣던 때였다. 당시 혼자만 핵심을 못 짚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몹시 비참했던 기억이 난다.
그 과목 성적도 잊지 못한다. 성적 오픈 날 B를 받았다. 예상보다 성적이 잘 나와서 의아했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성적 조회를 했더니 D로 정정되어 있었다. 뭔가 따지고 들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어렸고 말이 통하지 않는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질색하고 넘겼다.
그 일로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이후 최대한 그 교수를 피해 다녔다.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과목이 있었는데, 바로 그 교수의 수업이었다. 1년 만에 다시 조우했고, 교수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반색을 하며 환대를 해 주었었다. 이어 과거에 내 성적을 후하게 줬다며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을 보며 D를 준 것을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낙제(F)인데 잘 쳐줘서 D로 승격해 줬다는 것이지. 알지 못해 상당히 혼란스러웠었다. 그는 나에게 또 한 번의 번뇌를 남겼다. 사건의 내막이 궁금했지만, 섣불리 대화를 이어갔다가는 몹시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로 인해 그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궁금하다.
타임머신이 내 손에 있다면 로또 번호는 차치하고 그 인간이 성적을 매기던 날로 되돌아가 채점표를 엿보고 싶은 심정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저/양윤옥 역 | 현대문학 | 2016년 01월 11일 | 원제 : ラプラスの魔女
정보/지식 : ★★★★★
재미/감동 : ★★★★★
#참고자료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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